남명 세상을 일깨우다(29) <산청 구비문학>(박종섭. 산청군, 2012)에 나타난 남명 선생

산청시대 2022-06-09 (목) 00:51 1년전 1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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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재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과 한국선비문화연구원

구비문학이란 글로 써서 전하는 문학이 아니라, 말로써, 입과 귀를 통해서 전해지는 문학이다. 따라서 문자로 기록되는 문학이 작자의 마음을 통해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 작자의 붓을 통해서 창작되듯이 구비문학은 처음 발생할 때의 이야기가 화자의 생각에 따라 변하면서 전해온다. 산청군이 민간의, 마을 항간의 이야기를 채집해서 기록으로 남긴 일은 아주 잘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남명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도 화자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이야기 중에 우리 산청지역에서 채록한 이야기로 나타난 민담을 몇 편 뽑아 본다.

◇시천면 사리에 얽힌 이야기
‘이전에, 그 사리라는 동네 지명이 잘 없었는데, 이전에 사륜동이라꼬 했거든, 실 사짜, 실 륜짜, 실사 변에 인륜 윤 한 자, 그 사륜동이 임금이 내리는 조서 그걸 사륜이라 하는데, 그 조서가 내려온 동내라고 사륜동이라꼬 불렀는데, 그 조서가 우째서 내려왔느냐? 고려 때 한유한이라는 녹사가 있었어. 아주 유명한, 역사를 기록하는 녹사, 그 녹사가 고려가 망하자 여 와서 숨어 있었어. 이조에서 그를 갖다가 벼슬 시킬라 칸께네, 피해 내려와서 숨어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세월이 오래 된깨내 알아갖고, 임금이 조서를 내려보냈어. 칙사가 와 가꼴랑.
“임금의 조서를, 사륜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러쿤께네 깜짝 놀래거든. 자기가 숨어 있는데….
“알것다”고, “그럼 내가 조서를 그냥 받을 수 없은 께네 옷을 갈아 입고, 정화수를 떠 놓고 청에서 받을 낀께네 잠깐 밖에서 기다리달라” 이러쿠고 문을 닫고 들어갔거든.
들어가서 시간을 수타이 기다려도 안 나오거든. 그래 우찌 됐지 싶어, 문구녕을 뚫어 갖고 디다 봤어. 디다 본께 사람은 없고, 뒤쪽 벽에 군영이 뻥 뚫어 나가 있거든. 그런께네 그 조서를 “안 받는다” 소리는 못하고, 뒤에 벽을 뚫골랑 고마, 도망을 가삐리지.
그래서 그 조서를 전하지 못했거든. … 그라고나서 인자 그 사람이 한유한이다. 한녹사다. 카는 걸 알아가꼬 … ‘일편사륜비입동一片絲綸飛入洞, 시지인간유인래是之人間有人來.’ … 그런깨내, ‘한 쪼가리 사륜이 날아와서, 비로소  한 녹사라는 인간이 여기 와서 있었구나.’ 그래서 그 전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몰랐는데, 그래서 … 그 참 유명한 벼슬아치가 여기 와서 있었구나. 카는 것을 알았다는 그런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 그래서 사륜동이라 카는 … 왜정 때 사리라고 고치삣거든. …’

<진양지>에 의하면 지리산 조에 어디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한유한이 써놓고 갔다는 시는 ‘일편사륜래입동一片絲綸來入洞, 시지명자낙인간始知名字落人間’으로 되어 있다. 이 시의 ‘사륜’과 사륜동絲綸洞의 ‘사륜’이 일치하는 것은 틀림이 없으니… .
남명 선생 <유두류록>에는 ‘…강가에 삽암鈒巖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를 지낸 한유한韓惟漢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그를 불러 대비원녹사大悲院錄事로 삼았는데, 그날 저녁 달아난 곳이 묘연했다.’로 나온다. 최씨 무단정치를 피해 숨어살았다 한다. 유추해 보면, ‘사륜동에 살다가 삽암으로 옮겨 갔다?’. 사륜동의 집 뒷문을 박차고 달아나 하동 섬진강 변으로 와 낚시하며 숨어 살았을까? 원래부터 삽암에 살다가 어디로 갔는지 모를까? 여러 가지로 상상만 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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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산천재

◇입덕문 식장암 유래
‘입덕문은 단성면 소리당에 있는 지명인데, 남명 선생이 가시덤불을 헤치고 들어오셨다고 그래. 입덕문이라 쿠는 지명이 생겨졌고, 또 식장암은 신안면, 지금 지서 있는데서 1km 올라가서 질가 있는 바구가 있는데, 도로가 개척되면서 그 바구가 깨져버리고 없어요. 없는데(비느리, 비나리 고개 근처 어디쯤), 남명 선생이 삼가서 여, 덕산에 오시면 반드시 그 바구에서 작지를 멈추고 쉿다고, 그래서 식장암息杖巖이라. …’
식장암, 장구지소杖?之所 등, 유명한 어른들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 곳에는 대개 이런 이름들이 붙는다.

◇덕전강 꺽정이의 아가미 상처 내력
‘산청군에, 덕산 쪽에서 흘러나오는 덕천강이라는 강이 있는데 물이 아주 맑아서 고기들이 많이, 민물고기들이 많이 삽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특히 이름나 있는 것이 꺽지라고, 꺽겅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덕천강에서 나는 꺽정이는 특색이 있다고 그러죠. 남명 선생께서 산천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하루는 천렵을 하기가 되었더랍니다. 강가에 나가서 제자들하고 더불어서 고기를 잡아다가 회를 쳐서 이렇게, 회식을 하고 이래했는데, 남명 선생께서 잡아 온 꺽지를 회를 쳐서 술을 자시면서 천기를 보니까, 나라에 국상이 났더랍니다.
선생께서 그때 마침 그 입에다가 꺽지를 입에 여어서 막 이빨로 깨무는 중에 그 천기를 봤더라지요. 국상을 당하면은 그 신하 된 백성들은 소를 해야 되기 때문에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해서 입에 일단 이로 가지고 한번 깨물었던 꺽지를 내어다가 뱉었다고 그럽니다.
그 물에 뱉아니까, 한 번밖에 안 깨물렀으니까 그 살아갔는데, 그때 깨물 때가 아감지라고 해서 고기가 물로 먹으면은 나가는, 뿜는 고 부분에 이빨 자국이 남아가지고 있다고 그러죠. 그건 남명 선생께서 뱉았던 덕천강 꺽지는, 아감지 밑이 하얗게 이빨 자국이 있다고 그렇게 애기 전하고 있습니다.’

산청 백곡 쏘가리 연구가 김진규 씨에 의하면, 덕천강 꺽지는 다른 강의 꺽지와는 달리 이빨 자국 같은 무늬가 있다고 하니 신기한 일이다. 이정 등과 회를 먹었다느니, 이제신이 남명을 위해 꺽떠구를 준비했다느니 하는 여러 민담이 전해오고 있다. 이 모두 남명의 ‘이인 설화’異人說話로 볼 수 있다.

◇팥밭 고개, 제자 의병장 48인 잠두혈蠶頭穴
‘남명 선생이 합천서 오실 때에, 등금장사라는 지게에다가 단지에다 밥을 앉히가지고 단성을 지내 오는디 고개를 넘는데, 달빈 고개라고 있었다 컵니다. 달빈 고개 오니까 달이 비움하이 뜨더랍니다. 인자 달이 뜨는디 앉혀논 밥이 오데와 떳는기 아이라, 팥밭재 오시니께 폴폴 넘드랍니다. 폴폴 넘어가지고 그 인자 팥밥재 이래 되고, 아침 자실 때가 돼서 내려가서 앉아가이 있으니께 그 골이 매우 좋더랍니다. 그 골 경치로 지세로 보니께네 하리 날 천 냥이 들고 나고 하는데 한 날, 하는 자린데 양반 살 곳은 안되고 옹구점 밖에 않되겠다. 이래서, 거기서 앉아 쉬가지고 아침 자신 데가 포로 남기기 위해서 소나무 한 그루를 파다 심었답니다.
그라고 나서 덕산을 지나 지리산 밑에 들어가는데 경치가 하도 수려해서, 앉아 자리가 어딘가 하믄 지금 현 입덕문이더랍니다. 입덕문에 앉아가지고, 입덕문이라고 글자로 석 자를 새겨놓고, 덕산으로 들어가, 가만 지세를 보니께네 니에가(누에가) 밥을 먹는 자린데 여기가 내 살리라. 이래 터를 정하고 보니께네 내대서 내려오는 물하고 삼장에서 내려오는 물하고 양단수라. 그래 가지고 두류산 양단수 그 시조를 남기고 이래 됐는데, 그리고 나서 산천재를, 서당을 지었답니다.
서당을 지어가지고, 거기서 후학을 양성하는디, 후학 양성자는 우짜든지 조국을 위해 싸와라. 이래 가지고 임진왜란 때, 조식의 제자들이 의병장 된 분이 사십팔가라. 마흔여덟 분이 나와가지고 지금까지 추모제를 이때까지 지내고 있습니다.
조식 선생님께서는 자기 사후의 신의지(신후지身後地)로 정하실라꼬 지리산 밑에 유평이라커나 거기를 올라가시다가 지금 촌명이 명상인디, 그 지점에 가시 가지고 실족이라 커실까 어쨌던 자빠져 가지고 면상을 깨서 면상이라 캅니다. 그래 가보니 벌모를 하고 있더랍니다. 그래 보니 그분이 중이고, 거기는 이미 내 자리가 아이다. 이래 가지고 회로로 하시고, 정한 것이 지금 잠두혈蠶頭穴이라고 합니다. 사십팔가, 임진왜란 때 사십팔 인의 의병장이 나왔다고 카며는 그 양성을 누가 하신는가? 그 남명 어른이, 지금 보면은 우도 이게 우세했지, 퇴계는 관직만 탐욕을 부렸지. 관직에 탐욕 안 부리신 분은 그 남명인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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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석 화백 산천재도


이제까지 단성면 중촌의 한 지방민이 남명 선생에 관한 여러 면을 이야기한 것의 채록 거의 전편을 인용 기록해보았다. 물론 줄거리가 체계적이지 않지만 덕산으로 이거 할 때의 모습에서부터 사후의 공과까지를 모두 구술했다고 볼 수 있다. 남명 선생은 보통 사람과 달리 특별하다는 이야기이고 산청 땅 덕산으로 와서 미래에 닥칠 국란을 대비했다는 이야기이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가에서 덕산으로 오실 때, 단지에 팥밥을 앉혀서 지게에 달고 재를 넘으니 저절로 끓어서 팥밥이 되었다. 그래서 팥밥재라 한다.
고개를 넘어 앉아서 지세를 보니 형국은 좋은데 살 곳은 아니고 옹기점이 알맞다고 하시면서 그래도 앉았던 자리에 소나무를 심어 표시해놓았다.
입덕문으로 들어가시면서 세 글자(입덕문)를 써 놓고 덕산으로 들어갔다.
사리에 들어가니 누에가 밥을 먹는 잠두혈蠶豆穴이라,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 48가家의 의병장을 길러 국난을 대비했다.
신후지身後地를 잡으려고 유평으로 들어가다가 명상에서 낙마해 얼굴을 다쳐서 면상面傷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 그곳 어디에 자리를 잡았더니 어떤 스님이 벌묘伐墓를 하고 있더라. 그래서 ‘내 자리가 아니다.’하고 돌아 내려왔다. 마침내 잠두혈에 신후지를 잡았다.
남명 선생은 벼슬은 안 하시고 나라 지키는 일에 애를 썼다.

이런 이야긴데,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민간에서 남명 선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 물론 기록물에 나타난 사실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지만, 그 맥락이나 민간의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해가 된다.

 


조종명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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