換鵝亭 重建記

산청시대 2022-07-12 (화) 23:55 1년전 947  

옛 先賢들은 山水가 秀麗한 곳에 亭子와 樓閣을 지어 그 地域의 地理形勝을 널리 알리고 百姓들과 詩人墨客들이 올라 詩文을 짓기도 하고 風流를 즐기며 世波에 시달린 心身을 달래며 浩然之氣를 기르기도 하였다.

우리고을 山淸은 東國의 鎭山 頭流山 天王峯이 우뚝 솟아 東南으로 그 脈이 흘러 北쪽에는 文筆峰이 우뚝하니 綺羅星같은 學者가 끊이지 않았고, 王山에는 駕洛國의 歷史가 서려있다. 南쪽에는 熊石峰이 나래를 펼치고 멀리 頭流 德裕山이 屛風처럼 펼쳐져 北風寒雪 막아주고 德裕山에서 發源한 鏡湖의 맑은 물은 굽이굽이 감돌아 百姓들의 젖줄로서 豊足하였다. 蘭亭記에 詳考하건대 中國 會稽山陰의 山林과 流水는 그 아름다움이 더 比할 데가 없다고 했는데, 어찌 우리 山陰의 風光이 會稽에 뒤지겠는가.

太古의 神?를 간직한 雲林泉石의 自然環境이 天惠의 名勝을 이룬 이곳 에 일찍이 1400年代에, 靑松 沈潾이 縣監으로 赴任하여 牧民官으로 善政을 베풀더니 百姓은 淳朴하고 政事가 太平하였다. 이에 客舍의 後院으로 亭子를 創建하고, 權攀이 이름을 지으니 換鵝亭이라 中國의 古史에서 由來하였다. 朝鮮 初期 激動의 時期에 이런 大 役事를 推進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沈潾 縣監의 父, 祖父, 曾祖父가 三代에 걸쳐 政丞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朝廷의 協助가 있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이후 換鵝亭은 晉州의 矗石樓, 密陽의 嶺南樓와 함께 嶺南의 三大 樓閣으로 손꼽혔으며 山淸이 선비의 故場임을 알리는 象徵的인 樓閣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597年 丁酉再亂 때 倭寇에 依하여 燒失되었고, 1640年頃 權淳에 依해 復元되었으나 1950年 火災로 因해 또다시 燒失되는 悲運을 겪었다. 中間에 여러 차례 補修와 丹靑, 그리고 付屬建物을 建立한 바 있으나 旣存의 記文에 記錄되어 있으므로 일일이 列擧치 않는다.

先賢들이 물려준 所重한 文化遺産을 길이 保存하여 後代에 傳하는 것은 現代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責務이다. 數많은 별들이 北極星을 向하듯이 그동안 고을의 守令들이 復元을 生覺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與件이 맞지 않아 實行치 못하였다. 이에 平素 傳統文化의 重要性과 歷史意識이 透徹한 李在根 郡守가 山淸의 象徵的인 換鵝亭을 復元키로 決斷하고 沈載和 郡議會議長과 郡議會가 合心하니 그 精誠이 天地를 感動시키고 神明을 움직여 大義를 成事케 한 것이다.

總 1210坪의 敷地에 亭子와 樓閣의 固有한 멋을 살려 2年餘 만인 2022年(壬寅) 五月에 完工하니 그 姿態가 雄壯하여 옛 모습에 比해 遜色이 없다. 嗚呼라! 世上이 朝夕으로 變해 古道와 古禮가 사라져가는 時代에 이러한 大 役事를 이룩함은 天運이 到來함인가. 이는 六百餘年 前에 先賢들이 세운 큰 뜻에 매우 附合하는 일이며, 永久히 保存치 못했던 悚懼스러움을 이제야 免하게 되었음이다.

歷史를 잊은 民族은 未來가 없다고 했다. 先賢들의 崇高한 蘖이 새겨진 이 亭子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 天惠의 自然風光에 世俗의 얽매임을 씻고, 心身을 가다듬어 山淸이 선비의 故場이요 實踐儒學의 産室이며 나라의 危機에는 기꺼이 목숨도 바치는 義로운 百姓들이 代를 이어 사는 곳임에 矜持를 느끼며 올곧은 선비精神을 培養하여 換鵝亭과 함께 千秋萬代에 그 精神이 이어지기를 祈願하며 이에 重建記文을 짓는다.

西紀 二千二十二年 壬寅 五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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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아정 기문

환아정 중건기

옛 선현들은 산수가 수려한 곳에 정자와 누각을 지어 그 지역의 지리형승을 널리 알리고 백성들과 시인묵객들이 올라 시문을 짓기도 하고 풍류를 즐기며 세파에 시달린 심신을 달래며 호연지기를 기르기도 하였다.

우리고을 산청은 동국의 진산 두류산 천왕봉이 우뚝 솟아 동남으로 그 맥이 흘러 북쪽에는 문필봉이 우뚝하니 기라성 같은 학자가 끊이지 않았고, 왕산에는 가락국의 역사가 서려있다. 남쪽에는 웅석봉이 나래를 펼치고 멀리 두류 덕유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북풍한설 막아주고 덕유산에서 발원한 경호의 맑은 물은 굽이굽이 감돌아 백성들의 젖줄로서 풍족하였다. 난정기에 상고하건대 중국 회계 산음의 산림과 유수는 그 아름다움이 더 비할 데가 없다고 했는데, 어찌 우리 산음의 풍광이 회계에 뒤지겠는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운림천석의 자연환경이 천혜의 명승을 이룬 이곳 에 일찍이 1400년대에, 청송 심린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더니 백성은 순박하고 정사가 태평하였다. 이에 객사의 후원으로 정자를 창건하고, 권반이 이름을 지으니 환아정이라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초기 격동의 시기에 이런 대 역사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심린 현감의 부, 조부, 증조부가 삼대에 걸쳐 정승의 직에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협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환아정은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영남의 삼대 누각으로 손꼽혔으며 산청이 선비의 고장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누각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하여 소실되었고, 1640년경 권순에 의해 복원되었으나 1950년 화재로 인해 또다시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다. 중간에 여러 차례 보수와 단청, 그리고 부속건물을 건립한 바 있으나 기존의 기문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일일이 열거치 않는다.

선현들이 물려준 소중한 문화유산을 길이 보존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무이다. 수많은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듯이 그동안 고을의 수령들이 복원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맞지 않아 실행치 못하였다. 이에 평소 전통문화의 중요성과 역사의식이 투철한 李在根 군수가 산청의 상징적인 환아정을 복원키로 결단하고 沈載和 군의회의장과 군의회가 합심하니 그 정성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신명을 움직여 대의를 성사케 한 것이다.

총 1210평의 부지에 정자와 누각의 고유한 멋을 살려 2년여 만인 2022년(임인) 오월에 완공하니 그 자태가 웅장하여 옛 모습에 비해 손색이 없다. 오호라! 세상이 조석으로 변해 고도와 고례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이러한 대 역사를 이룩함은 천운이 도래함인가. 이는 육백여년 전에 선현들이 세운 큰 뜻에 매우 부합하는 일이며, 영구히 보존치 못했던 송구스러움을 이제야 면하게 되었음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선현들의 숭고한 얼이 새겨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 천혜의 자연풍광에 세속의 얽매임을 씻고, 심신을 가다듬어 산청이 선비의 고장이요 실천유학의 산실이며 나라의 위기에는 기꺼이 목숨도 바치는 의로운 백성들이 대를 이어 사는 곳임에 긍지를 느끼며 올곧은 선비정신을 배양하여 환아정과 함께 천추만대에 그 정신이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이에 중건기문을 짓는다.

서기 2022년 임인 5월

성균관 고문, 원임부관장 청송 심동섭 짓고 신구 윤호석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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