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원사업은 ‘덕천서원 복원’과 ‘정조대왕 사제문비’ 발굴
그 유복자 휘杓(1869~1935, 자 자앙子昻, 호 창하蒼下, 배 경주 이씨 호영浩榮의 따님)가 불초의 증조부시다. 덕천서원 내임을 오래 하셨고, ‘신도비 시비’, <남명집> 개간 등 ‘선생 사업’과 ‘종중 사업’에 헌성하셨다. 이분이 아들 세 분과 딸 한 분을 낳았다. 백씨 송헌공이 나의 왕고王考이시다. 한의학을 배워 약국을 경영하셨고 면의원을 지냈다. 어려운 시절 일본으로 가셔서 개업하기도 해서 그 뒤에 일본에서의 명성으로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더러 보기도 했다. 전쟁 후 사는 형편이 어려울 때 가정에 매우 보탬이 되었다. 송헌 왕고는 늘 우리집 가세를 “부불백석富不百石(부는 백석에 겨으 미쳤고)이요, 세불통정勢不通政(가세는 통정대부를 겨우 했다)”이라 하시면서 불만해 하셨으니, 그 자존심은 대단했다. 이 손자의 불초함이 더욱 죄스럽다. 사랑舍廊에는 늘 덕천서원, 소천재小川齋(복암, 현재의 채례를 모시는 재실)의 손님들이 끊이지 않아, 어머니 진양 강씨가 어려운 살림의 접빈객에 늘 염려가 크셨다. 원근에 초상이 나면 어르신들이 만서挽書를 지으려고 모여서, 조부님이 쓰시거나 대포 사는 게섭啓燮씨(현재공 아드님)가 써서 깃발처럼 만들어서 들고 하얀 두루마기에 명주 행의行衣를 입으시고 여러 어른들과 같이 가시곤 했다. 유고遺稿 약간을 수습한 것이 있지만 그 간행을 못 하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후천공은 취미가 조금 달라 산골에 가서 소주 내리는 사업을 하기도 했고, 가정 살림이 어려워 다른 지역에 가셔서 서당을 열어 훈장을 하시기도 했다. 덕천서원 내임을 오래 맡아 <남명집>과 <덕천사우연원록> 간행을 주도했다. 사례편람四禮便覽을 사용하기 좋게 간략히 지어 불초에게 주셔서 혼상제례婚喪祭禮시에 자주 보고 사용하고 있다. 계종조부는 신양身恙으로 늘 고생하셨다. 불초가 잠시 ‘시전’詩傳을 배운 적이 있다. 늘 한문으로 일기를 쓰고 시를 지어 시축을 만드는 것을 보았으나 전하는 것이 없다. 이제 다시 후손에게 기대한다. 자녀들에게 나는 늘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라”라고 당부한다. 보통 사람으로 바르게 살고 남의 칭찬은 못 받아도 욕은 먹지 않는 사람 되기를 나는 바란다. 먼 선대 어른들에 관해서는 덕천서원과 왕래한 통문 등에서 함자銜字를 발견한 적이 있고 특별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우리 집은 6.25 몇 해 전에 화재를 보았고 화재 후에 왕고공과 선고공께서 오칸 겹집으로 기와집을 짓고 사랑방에는 왕고의 고서가 안채에는 선고의 신서가 가득했으나 3년 후 6.25 전란으로 서책과 고문서가 모두 불타고 겨우 목숨을 보전했다. 두 번의 화재로 남은 것이 거의 없다. 근래에 관천觀川 허모許模공(1876~1944)의 문집을 보다가 관천공이 증조부에 대한 만사와 조부께서 관천공을 만輓한 글을 보고 두 분 할아버지를 뵙는 것 같았다. 나의 왕고공은 곤명면昆明面 김성리金城里의 명문인 합천 이씨 가문으로 출입하셨다. 왕고공의 장인되시는 분(이규창李圭昌)이 한시백일장을 주관하는 자리에 왕고께서 장원壯元을 하시어 매우 사랑을 받았다고 친구들과 말씀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집안이 6.25동란 중 온 집안의 행방을 알 수 없어 불초가 찾으려 애를 썼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송헌공은 성품이 엄하셔서 종조부 두 분은 늘 꾸지람을 듣곤 했다. 그리고 여재실에 부조묘不?廟 제사(남명 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 기제사忌祭祀와 절사節祀) 때는 삼 형제분이 이웃 어른들과 같이 십리가 넘는 곳으로 꼭 걸어서 가셨다. 나의 선고 어른은 휘 기호基鎬(1919~1950, 일명 기창基昌, 호 죽리竹里, 배위는 진양 강계매姜季妹. 필수必秀의 따님1919~2001)이다. 꼭 해야 할 서원 일은, 유정루幽靜樓과 취성정醉醒亭 복원, 동서재에 제월헌霽月軒, 광풍헌光風軒 복원(덕천서원 편 참조), 서원 뜰을 발굴하여 방당方塘을 찾는 일과 ‘정조대왕 사제문비’(시정문과 주차장 사이에 전쟁 때 군인들이 밥그릇을 씻어서 엎어놓는 것을 보았다 하니 발굴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를 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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