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향교에서 강의한 <여김숙부>與金肅夫 편지

산청시대 2023-01-12 (목) 01:17 1년전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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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향교에서 강의하는 조종명 선생

그날의 강의 내용을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지난번 며칠 동안 오붓한 자리를 갖기는 했지만, 우스갯소리가 뒤섞여 도무지 정밀한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문득 그것을 취해 규계로 삼았으니, 이를 두고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구려. 그대는 남에게서 잘 취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살펴보건대, 내가 그대에게 걱정스러운 것은 ‘하룻볕을 쬐이고 열흘을 춥게 하는 것’(<맹자> 고자告子 상편에 나오는 말로, 하루 학문에 나아가고 열흘을 그렇지 못함을 나타내는 말)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근본이 확립되지 않아 행동을 절제하는데 재능이 없으며, 학문을 강구하는데 정밀하긴 하지만 치용致用에 졸렬하여 자유자재로 운용해 쓸 수 있는 수단이 짧으니, 이점이 가장 시급히 가꾸어야 할 일입니다.
일찍이 살펴보건대, 자(척도尺度)는 집집마다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집마다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찮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푼(分), 촌(寸)의 눈금도 매우 명백합니다. 그런데 이 자를 이용하여 구장복九章服을 마름질하는 사람도 있고, 한 자 밖에 안되는 버선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그대의 자로 처음 모양의 물건을 마름질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알 일입니다. 다 갖추지 못합니다.”(<남명집> 여김숙부與金肅夫(김숙부에 줌))

이야기의 내용은 ‘김숙부에 주다’라고 하는 편지의 전문이다. 편지는 편지를 써서 보내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꼭 할 말이 있어서 보내게 되므로, 그분의 깊은 마음 뜻이 담겨 있다. 김숙부에게 보낸 편지는 <남명집>에 여러 편이 있지만 그중에 이 편지를 그날 강의의 내용으로 삼고 싶었다.
숙부는 동강東岡 김우옹金宇?(1540~1603)의 자다. 의성 김씨로 성주 사람이다. 덕계 오건(1521~1574)이 1559년에 성주향교 훈도로 왔을 때, 동강과 한강 정구(1543~1620)가 찾아와 배운 적이 있다.
1551년 동강의 부친인 칠봉 김희삼(1507~1560)이 경차관敬差官으로 우도右道 여러 지역의 재해를 조사하러 왔다가 계부당鷄伏堂으로 남명 선생을 찾아왔었고, 그로 인해 뜻이 통해 종유從遊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래서 그의 아들들이 문하에 들게 되었을 것이다.

동강은 1562년에 선생에게 집지執贄했고 1564년에 선생의 외손서가 되었다. 사제 간에 자주 만나 가르침을 받았고 편지 왕래도 잦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선생이 차고 있던 성성자惺惺子를 끌러서 주었으니 사랑함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알 수 있다.
선생이 <신명사 도·명>神明舍 圖銘을 짓고 제자들이 그 내용을 어려워하자, 동강에게 이를 학자가 잘 이해할 수 있게 글을 지으라는 명을 받고 천군전天君傳이라는 가전체 소설을 지어 제자들로 하여금 잘 이해하게 하였다. 천군전은 1566년에 지었다 한다.
이 편지는 학자가 ‘학문을 강구하는데 정밀해야겠지만 치용이 졸렬하다. 그래서 살활수殺活手가 짧으니, 이 점이 시급히 가꾸어야 할 일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박병련 남명학연구원 원장은 이점을 매우 관심 있게 연구하여 남명학이 다른 학자와 특이한 실천철학의 요체로 보고 있다.

선생은 늘 말씀하기로 귀로 들어서 입으로 달달 외우기만 하는 학문은 ‘구이지학’口耳之學(귀와 입에 발린 학문)이요, ‘앵무지학’鸚鵡之學(앵무새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외우는 학문)이라고 했다. 학문의 효용은 잘 외워서 이론에 밝은 것도 중요하지만 이론을 체득하여 그것을 실생활에 실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체득하여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동강은 학문이 높고 벼슬도 높았다. 그런데도 선생은 ‘근본이 확립되지 않아 행동을 절제하는데 재능’이 없다고 준열히 경책하고, ‘학문을 강구하는데 정밀하긴 하지만 치용致用에 졸렬하여’ 잘 활용하고 운용해 ‘쓸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니, 이 점이 시급히 가꾸어야 할’ 일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대장부의 행동거지는 무겁기가 산악 같아서 만 길이나 깎아선 듯하다가 때가 오면 움직여야 바야흐로 허다한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차고 있던 성성자惺惺子를 끌러주면서, ‘이 물건은 맑은소리로 사람을 깨우쳐줄 줄 안다. 내 귀중한 보배로서 자네에게 주는 것이니 자네가 능히 이것을 지니겠는가?’ 하자, 동강이 묻기를, ‘이는 옛사람들이 옥을 차는 뜻이 아니었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길, ‘실로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가 더욱 절실하니 이연평李延平 이동李?(1093~1163, 주자의 스승)도 일찍이 찼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뇌천’雷天이란 두 글자를 써주면서 ‘대장’大壯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였다. 요컨대 방울의 맑은소리를 듣고, 흐트러지는 마음을 불러 깨우치고 자신을 반성하여 매사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뇌천은 주역 대장괘의 뜻을 취한 것으로 성찰하고 극기하는 공부를 부지런히 힘쓸 것을 당부한 것이다.’ (<남명원보>, 2002. 6. 이상원 ‘산천재에 이는 대바람 소리’)

선조가 경연經筵에서 동강에게 묻기를, “그대는 일찍이 조식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니 반드시 들은 바가 있을 것이고, 또한 그대의 학문하는 것이 독실하니 그대가 한 공부는 어떤 것이냐?” 이에 대답하기를 “신은 실로 공부를 잘하지 못하였습니다. 조모曺某(조식)의 가르친 바를 말하자면 흩어지는 마음을 모우는 것(구방심求放心)을 근본으로 삼고, 또 경敬을 주장함으로써 흩어진 마음을 찾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독립운동가요,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설립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은 동강의 13대 종손이다. 그가 벽옹?翁이라 자호하는 이유는 일경의 고문으로 양발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덕천서원에 첨알瞻謁하러 왔는데 지게에 지워서 왔더라고 할아버지께 들은 기억이 있다. 그의 스승 면우 곽종석(1846~1919)이 <파리장서>를 지어 중국으로 보낼 때 일화가 있다.

“이 글을 모두 외워라, 그래도 혹시 잊을 수가 있으니 이 종이를 행으로 잘라 노를 비벼 신을 삼아 가면 일경의 검문을 피해서 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과, 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 밀양 손씨가 옥바라지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너는 좋은 자리를 찾아 개가하거라.”하였더니, 손씨의 대답이 “아버님이 저를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절대로 안 될 말씀입니다.”했다고 한다. 그 자부는 외롭게 100세를 살다가 2016년에 별세했다.

그리고 집안사람에 중재 김황(1896~1978)이라는 분은 산청군 신등면 내당內塘 마을에 살았는데 흔히 세상 사람들이 최후의 선비라 했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 배웠고, 특히 대학교수들이 많이 찾아왔었다. 그의 이름자 황榥을 보면 ‘나무 목木과 밝을 황晃’을 합한 글자이다. 목木 자는 남명 선생의 이름자 식植에서 따왔고, 황晃 자는 퇴계 선생의 이름자 황滉 자에서 따왔다 한다. 곧 남명 퇴계를 모두 배워 닮고자 하는 뜻이라 하니 강렬한 두 대현에 대한 학구의 의지를 알 수 있다.

조종명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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