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37) <남명의 후예로 살아가기> 출판 이후 쏟아진 고견

산청시대 2023-01-12 (목) 01:20 1년전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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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출판기념회

<남명의 후예로 살아가기> 책이 출간되고 나서 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다. 사실 필자는 자손이 선자先子 남명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만큼 두려움이 많았다. 먼저 책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가 문제였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중 최구식 한국선비문화원장이 원고를 읽어보더니 <남명의 후예로 살아가기>가 좋겠다고 했다. 즉시 수용했다.
 
몇 분의 독자로부터 편지 혹은 전화를 받았다. 현석玄石 이호신李鎬信 화백은 세 번을 읽었고 읽은 것을 줄을 쳐가며 읽었다는데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진실을 잘못 썼거나 필자 자신의 사유가 깊지 못했거나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큰 죄를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도 마음을 쓰는 일이 부족한 글을 쓴 나의 마음에 너무 큰 짐으로 짓누른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더 글을 써야 한다. 그 운명의 멍에가 무겁다. 칭찬만 해주는 독자는 그저 인사치레 또는 나의 글에 관한 의견의 합의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더 알아보기 위해서 질문해오는 독자에게는 내가 아는 정도에서 상세히 말씀을 드렸고 어떤 참고서를 찾아보시라고 말씀드리기도 했다.

이 책의 출간이 시간이 너무 바빠 교정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건 큰 실수였다. 내가 봐도 오식 오자가 더러 있다. 특히 결정적 실수는 표지에 저자가 누구인지 출판사가 어딘지 표시가 없다. 책의 표지도 보지 못한 채 출판기념회를 열었으니 이런 실수가 어디 있겠는가? 이 책을 보신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결국 저자와 출판사는 한 장만 넘기면 알 수 있으니 아무 표시 없는 표지가 오히려 깨끗하더라.’라고 하는 의견도 있었으니, 이것은 필자를 위안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으리라. 여하간 실수 속에 책은 세상 속으로 나갔고, 모든 책임은 필자가 질 수밖에는 없다.

옛 청천의 선배인 부산의 성종화 시인은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1546~1632)의 후손이기도 하지만 성부사 관련 기사에 관심이 많았다. 단속사에서 좀 분탕을 쳐놓고 다음 날 남명 선생을 찾아 전후 경과를 보고 했다는 기사다. 성 부사는 지리산을 여러 차례 그 시대 명류들과 유람했고 <진양지>를 편찬하는 등 진주의 보배로운 인물이며 전국적인 명사다. 평론가 이유식 선배는 중앙 문단에서 문학평론가로 문명을 날리고 있지만, 그분의 선조인 일신당日新堂 이천경李天慶(1538~1610)에 관한 글을 못 쓰고 있어서 부러운 듯한 의견을 말해 오기도 했다.

한국 소설가협회 이사장을 지낸 소설가 김지연은 각 편마다 시를 한편씩 써서 소감을 나타내는 그런 작품을 썼으면 더 효과가 났을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여행문화>의 김가배 시인은 네 권을 사서 자기들 모임에 독서하는 자료로 쓰겠다 해서 보내드렸다. 물론 김영기 ‘남명사랑’ 대표님은 40권을 사서 독서회의 읽기 자료로 쓰시겠다고 사 가셨다. 모두 고마운 일로 다음에 후속편을 쓸 때는 많이 참고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김해의 하성자 시인은 ‘신산서원’ 창건에 관여했다고 한 김해 부사 하진보(1530~1580)의 후손인데, 글을 쓰는데 ‘술이부작述而不作했다’는 저자의 말에 큰 관심을 표시했다. 그 외 많은 분들이 관심을 표시해왔지만 다 기록하지 못한다.
(조이추(1661~1707)의 1705년에 쓴 기문에 방백 윤근수(1537~1616)과 읍재 하진보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창건 당시 윤근수나 하진보는 경상감사나 김해 부사가 아니었다고 했다)(<신산서원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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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기념회가 끝나고 마음을 좀 정돈하고 있던 지난 11월 24일 진주향교에서 2시간가량 강의를 했다.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1565~1624) 선생의 주손胄孫인 정기민 사무국장이 ‘남명 선생과 유림의 자세’라든지 적당한 제목으로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강의 주제를 정한 것은 ‘여김숙부與金肅夫, 김숙부에게 주다’라는 ‘제자이며 외손서인 동강에게 준 편지’로 정하고 그 편지 한 장을 달랑 복사해갔다. 수강생은 대부분이 필자가 잘 아는 진주의 유림 명사들이어서 강의라기보다는 거의 물으면서 강의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남명 사상을 옛 어른들은 경의학敬義學으로 파악 전승했다. 덕천서원의 강당 이름도 경의당敬義堂이라 이름하지 않았는가? 지금의 학자들도 그런 생각에 이의가 없는 것 같다. 어떤 분은 <중용>의 성誠 사상을 더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명 선생은 이론은 필요 없고 실천만 중요하다고 했을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이론에 매몰되어 실천이 잘되지 않는 지식인의 현실을 경계한 것이다.
나는 단적으로 말한다. 경의敬義, 성誠(진실무망眞實無妄), 치용致用을 잘하는 활수活手정신, 이 세 가지가 남명학이라고.

포정해우?丁解牛라는 말이 있다.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가 소에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려 칼을 움직이는 동작이 모두 음률에 맞았다. 문해군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어찌하면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포정은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손끝의 재주보다야 우월합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어느새 소의 온 모습이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그러면 천리天理를 따라 쇠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보통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장자莊子> 양생주편養生主篇)

이것이 활수의 실제인 것이다.
남명 선생이 1557년 보은에 가서 왕패취사지변王?取捨之辨(왕도와 패도를 취하고 버리는 변별)을 강의하는 한편으로 정일중화지설精一中和之說(마음을 한 곳에 모아 중화를 이루는 공부를 설함)을 강의했다는 것. 그리고 덕계에게 보낸 편지인 ‘오어사에게 줌, 여오어사서與吳御史書’에 보면 ‘…나는 평생 다른 기예技藝를 배우지 않고, 혼자 책만 보았을 뿐입니다. 입으로 성리性理를 말하고자 하면 어찌 남들보다 못하겠습니까?’라면서 공자가 성性과 천도天道에 관해서 드물게 말한 것이라든지, 화정和靜 윤돈尹惇(1071~1142)이 이에 대해 설을 내자 정 선생(정이程? 호 이천伊川, 1933~1107)이 경박한 설을 함부로 내지 말라고 저지하였다고 했다.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천상의 이치를 말하는 자들의 행동을 보면 무지한 사람만도 못하다.”고 했다.
어찌 남명 선생이 이론이 남만 같지 못해서 이론을 말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론의 논쟁은 19세기 학자들에게도 계승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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