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38) 아름다운 동행‥중천中天 김충렬과 경재敬齋 조옥환

산청시대 2023-01-25 (수) 15:50 1년전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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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렬 교수는 1931년 강원도 문막에서 출생했다. 대만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대만 문화대학 삼민주의 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중국국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조선조가 망할 때 선비로서는 유일하게 순국한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 선생이 쓴 <조선절의정신의계보>에 필자의 19대조이신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1351~1413)가 올라 있고 남명 조식 선생도 그 계보에 올라 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적잖이 기뻐한 일이 있다. 아마도 필자가 남명 선생의 고고탁절孤高卓絶한 기상을 지표로 향왕嚮往(마음이 어떤 사람이나 곳으로 쏠림) 하는 것도 그러한 정신의 혈맥이 전해져 있어서가 아닌가 한다.’ (<남명 조식의 학문과 선비정신> 김충열, p17)

 

김 교수는 고려 절신인 상촌의 19대손으로 경주 김씨다. 추사 김정희가 방조이다. 13대조는 사한四寒 김창일金昌一(1548~1631, 최영경 등과 같이 정여립 난 연루)이다. 

‘필자의 조상 김사한과 최영경과는 인척간이며 같은 학파 같은 문하의 선배였다. 뒷날 태학(성균관)에서 김사한을 서원에 배향하려고 전국에 돌린 통문을 보면, ‘일찍이 남명의 문을 지났는데 고제로 허여했다.’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아마도 최 수우당이 남명 선생을 뵈러 갔을 때 같이 따라간 것이 아닌가 한다.’(<전게서> p20.)

그가 말한 집안 내력의 대략이다. 그러나 <연원록>에는 찾을 수가 없다. 이로 보아 남명학파와 관계를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

 

김충렬 교수가 남명학 연구 40년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7년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철학사’의 남명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됨으로부터이다. 그는 남명이 일반 학자들 특히 퇴계와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강의했다.

 

첫째, 퇴계는 과거를 보고 벼슬에 나가 현실에 참여한 묘당유廟堂儒가 된 데 반해 남명은 과거를 단념하고 재야에서 근 50년간 연달아 일어난 4대 사화로 퇴상된 사기士氣를 진작시키고 인재를 양성하여 미래를 기약하는 산림유山林儒였다.

둘째, 퇴계를 위시한 일반 학자들은 정주程朱의 리학을 신봉하고 공소공론空疏空論에 빠져 이른바 앉아서 입으로만 떠들고, 일어서서 행동할 줄 모르는 허탄虛誕한 학풍에 빠져 있었다. 남명은 정주 이외의 북송오자北宋五子와 무려 120가에 달하는 중국 성리학자들의 저술을 섭렵하고 전방위적이고 개방된 학문체계를 열어갔다. 특히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중시하여, 원시유가原始儒家로 회귀, 이윤伊尹의 뜻과 안연&#38991;淵의 학문을 표방하여 실천유학實踐儒學을 역설했다.

셋째, 종래의 은일지사隱逸志士들이 민생과 국정을 외면, 독선을 일삼은 데 반해, 구차하게 왕과 조정에 복종하지도 않거니와, 부정 불의에 침묵하지도 않는 사림의 청의권請議權과 비판권을 행사하였다.

넷째, 퇴계는 논쟁을 좋아하고 방대한 저술을 일삼아, 책의 분량으로 학문성취를 평가하는 학풍을 조성한 데 반해, 남명은 유가 성현의 가르침은 미언대의微言大義이며 선유들이 그 맥락과 오의奧義를 소상히 밝혀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배워 실천하면 되는 것이지 관념 세계를 추구하여 정력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 스스로 저술을 기피했다. 그리하여 울연히 조선조 선비의 특징인 의리 정신을 고취하여 임란 때 삼남을 지킨 의병들이 거의 남명의 문하에서 나오는 실효를 보기도 했다.

다섯째, 조선 성리학도 송 원 리학理學의 중심 개념을 이어받아 학자마다 자기 나름의 모토를 내세우는데, 남명은 경敬과 성誠을 아우르면서 그것을 실천하는 추동력으로서 의義를 합치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남명학은 ‘경의협지지학’敬義挾持之學이라고하여, 강의직절剛毅直截한 과단성과 불요불굴不撓不屈하는 정신력을 실제로 실천해 보였다. 이 다섯 항목은 김충렬의 <상게서>에서 요약한 것이다. 남명을 모르는 학생들이 많아서, 다른 학자들은 30분, 남명은 2시간을 할애해 강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조선 유학의 ‘사주설’四柱說을 주장했다. 

그 네 기둥은 ▲퇴계의 이론유학理論儒學, ▲남명의 정신유학精神儒學, ▲율곡의 개혁유학改革儒學, ▲다산의 경세유학經世儒學이 그것이다.

이처럼 김충렬 교수는 조선 유학이 네 가지 큰 기둥을 세워서 학문의 방향과 그 내용의 다름을 명확히 구분해 놓았다.

 

그가 어떻게 해서 덕산으로 왔고 남명학이 깊은 어두움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을 찾아내어 선양했는가는 지난번에 거의 논술했다. 이번에는 그 숨은 비화와 그가 마음껏 남명을 찾아내어 세상에 펼 수 있도록 해 준 조옥환 씨와의 관계를 이야기 하려 한다.

 

김충렬 교수가 덕산에 첫 방문을 한 일을 술회한 글을 인용한다.

‘… 한 학기 강의가 끝날 무렵 철학과 학생이 연구실로 찾아와 자신이 남명 선생의 직손이라고 했다. 그 학생의 이름이 조을환曺乙煥이었다. 반가웠다. 사실 필자는 남명의 자손들은 얼마 되지 않거나 한미해져서 조상을 현양하지 못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자손이 약 500호(6.25전의 덕산 거주, 지금은 200호 미만 거주) 될 정도로 많다고 했다. 그리고 덕천서원에서 발간한 근간인 <남명선생 문집> 한 질을 주는 것이었다. … 필자는 불현듯 빨리 한번 가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 그 후 필자는 남명에 대해 글로 써서 발표하기로 했다. 마침 <아시아>라는 월간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이 와 남명에 관한 것을 실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이 글을 조영기曺暎基 씨의 사촌 여동생(당시 숙명여대 학생)이 보고 그녀의 아버지 조원섭曺元燮 씨에게 알려서 덕산의 남명 자손들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1975년인가 여름방학이 막 시작했을 때 조영기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덕산 남명의 유적지를 자신이 데리고 가서 안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꿈에도 그리던 남명 선생의 옛 자취가 남아 있는 산천재와 여재실, 덕천서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 

 

저녁은 조영기 씨의 본가가 있는 대포에 가서 먹었다. 조영기 씨의 아버님은 조의생曺義生 노장이셨고 덕천서원의 내임을 맡고 계셨다. 옛 노인들이 다 그랬지만 한학이 깊으시고 면장을 지내실 정도로 신학과 경륜이 많으신 분이었다. 우리는 뒤늦게 찾아온 부산교통 사장으로 있는 조옥환 씨와 어울려 내원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지리산 맑은 물에 목욕도 하고, 그곳 특산물로 유명하다고 하는 꺽두기를 안주로 해서 막걸리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필자가 남명 선생 현양 사업을 하면서 서로 손을 잡고 일한 이가 바로 이때 처음으로 만난 조옥환 사장이다. 그때 그는 당시 유행한 현대에서 나온 조그마한 하늘색 포니를 타고 왔다. 처음 만난 인상은 여러모로 나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키도 비슷하고, 몸매와 얼굴 생김도 비슷하고, 외고집 성격도 비슷한 것 같았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백년지기가 되었다. 기분이 좋아 술을 많이 마셨다. 대취했다. 먼 길을 오고 긴장도 해서인지 피곤했다. 조영기 씨의 집은 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여울 물소리가 은은히 자장가처럼 들렸다. 자다가 무슨 인기척이 있어 깨어 보니 조의생 노장께서 필자의 잠자리를 챙기고 계시는 게 아닌가.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깊은 잠에 들어 있는 양 모르는 체하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는 ‘이분들, 남명 선생의 자손들이 조상이 묻혀가도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자책의 한을 얼마나 품고 있었기에, 필자같이 이름 없는 교수에게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 매달리는가?’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고 필자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려야겠다는 마음의 다짐이 생기는 것이었다. …’ (김충열 <상게서> ‘책을 펴내며’ p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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