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원생록>과 <덕천서원원임록>에 이름 올라

산청시대 2023-02-16 (목) 00:41 1년전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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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담 이섬 임란 전공비 

이하생李賀生은 그의 아들 손자 3대가 <덕천원생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이 집안은 그의 아들 손자와 함께 3대가 원생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들의 후손은 대체로 남사에 거주했는데, 조선 말기까지 남인계 학맥을 이어왔다.
이하생의 증손 이윤현李胤玄(1670~1694)은, 18세 되던 해에 역병이 창궐하자 아버지를 모시고 산촌으로 피접避接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화적이 침입하여 부친을 칼로 베려 하자 이윤현이 몸으로 막았다. 온몸이 칼로 난자당하고 팔이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었지만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8년을 고생하다가 숨을 거뒀다. 성재 허전이 ‘영모당이공정려기’永慕堂李公旌閭記를 지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덕천서원원임록>에 이하생 후손이 8인(이조의 후손이 4인, 이담의 후손이 1인)이 등재되고 있다. 1700년대 전반기부터 1800년대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이 집안이 덕천서원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주도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하생의 후손 가운데 남계南溪 이갑룡李甲龍(1734~1799), 남고南皐 이지용李志容(1753~1831)이 지명당 하세응河世應(1671~1727)과 태와台窩 하필청河必淸(1701~1758)의 학문을 이어 남명학파의 학맥을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게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하생 후손 가운데 유독 원임이 많은 것은 대체로 이 집안의 흥성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필 <덕천서원을 이끈 강우의 가문들> ‘남명학연구’ 55집)
 
남고 이지용에 관해서는 지난번에 거론한 바 있기 때문에 ‘취성정’ 시 한 수만 보기로 한다.

취성정차원운醉醒亭次原韻

탁이선생덕卓爾先生德 우뚝한 선생의 덕이어,
등림황견금登臨?見今 올라 보니 황홀하여 지금 보는 듯.
위장첨수인危墻瞻數? 아찔한 담장 여러 길로 보이고,
초벽앙천심?壁仰千尋 높은 벽 천 길로 우러러 보이네.
임수정잉고臨水亭仍古 물가의 정자는 오래되어,
빙헌취부음憑軒醉復吟 난간에 기대어 취하고 또 읖조리네.
수교인지락遂敎仁智樂 인지를 좋아하는 것으로,
성아후인심醒我後人心 나와 후인들 마음 깨어 있게 하네.

‘남명의 뜻을 기린 회합의 장소 ‘세심정’洗心亭이 임진왜란에 불타고, 이후 복원하여 ‘취성정’醉醒亭이라 하였다. ‘취성’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의 ‘온 세상이 모두 탁한데 나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 취했는데 나만 정신이 또렷하네’(거세개탁아독청擧世皆濁我獨淸 중인개취아독성衆人皆醉我獨醒)라는 뜻에서 취한 말이다. 여기서 남고는 남명을 생각하고 그에 대해 ‘남긴 가르침으로 자신과 후인들을 깨어 있게 한다.’며 그 뜻을 기렸다. 남명을 ‘벽립천인’壁立千?의 기상을 가졌다고 기리는 데 대해, 남고는 ‘초벽앙천심’?壁仰千尋이라 하여 그의 기상을 읊었다.’ (이영숙, <남고 이지용의 시문학> 2019)
 
남고는 3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산천재를 중건하고 재장을 지냈고 덕천서원 원장도 지냈다. 남고에 대해서는 남명선생 후손인 덕암 조용완 편 (‘남명의 가계와 그 후손들’ 필자 지음. <남명의 후예로 살아가기>)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남고는 29세에 같은 마을에 살던 당질이지만 19세가 위인 이갑룡에게 나아가 배웠다.

월포月浦 이우빈李佑贇(1792~1855)은 10세 때부터 재종조인 남고에게 수학했다. 1827년 36세의 나이로 남명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상소문을 들고 도성으로 들어갔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와 이구산尼丘山 아래 집을 짓고 ‘월포농사’月浦農舍라 편액하였다. 그가 지은 ‘입덕문’入德門이라는 시에 ‘남명 부자댁 담장이 이 사이에 있으니, 문의 이름이 덕이라 산처럼 우러러 보이네.’(부자궁장재차간夫子宮牆在此間 문명이덕앙여산門名以德仰如山)라 했다.

남천南川 이도묵李道默(1843~1916)은 어릴 때부터 재종조인 이우빈에게 수학했다. 이후 성재 허전이 김해 부사 재임 시 덕천서원을 첨알하고 남사마을의 이하생 종가를 방문했다. 1905년 미수 허목의 문집 중 <기언>記言의 중간重刊 교정을 위해 몇 달간 ‘이의정’二宜亭에 머물렀는데, <기언> 중 ‘답학자서’에 ‘남명에 누가 되는 말이 있는 부분은 허목이 썼다고 볼 수 없다.’하고 통문을 돌렸다. 이도묵은 허목이 남명을 사숙했다고 보고, 이런 누가 되는 글은 문집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 관철했다.

이도추李道樞(1847~1921)는 이도묵의 아우이다. 그는 남명을 염두에 두고 지은 시가 많다. 특히 1893년 남명집을 중간할 때, ‘신명사도’神明舍圖에 관해서 많은 의견을 제시했고, 후산后山 허유許愈(1833~1904)와도 반복해서 논변했다.

이상으로 몇 분만 들어보았지만, 이 집안은 남명선생을 사숙하고 덕천서원을 관리한 수많은 학자가 나왔다.
구진성은 그의 논문 결론에서 ‘조선 말기를 살았던 모당某堂 이호근李鎬根(1859~1902)은 이 집안의 남명학 계승과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바로 자신의 선조들이자 남명 문인이었던 이조와 이하생이 남명 학문에 영향을 받은 실예를 서술한 것이다. 벼슬에 나아갔던 이조는 남명 출처에 영향을 받아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엄정히 유지할 수 있었고, 재야에 있던 이하생은 경의敬義를 기조로 일상에서 효제孝悌를 철저히 실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가계에서 지속적으로 남명 학문이 운위되고 대를 이어 전해졌음을 말해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구진성 <전게서>)

경상대학교 교수를 지낸 이임상李壬相(1932~) 교수는 2010년 종중과 경남 이순신 프로젝트 역사 고증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임란 참전 전공비’를 세웠다. 또한 ‘이순신 백의종군로’를 변경시켜 임란 공신 담曇과 섬暹의 묘소가 있는 중촌리 앞의 전공비 곁에 백의 종군 행로비를 세우게 했다. 종래에는 국도인 원지에서 비느리재를 넘어 문대, 단계로 가는 행로를, 단성 강누리에서 강을 건너 중촌리를 거쳐 재를 넘어 단계로 가는 코스가 옛날의 사람 다니는 길이었음을 고증해 바꾸게 하고, 중촌리 안곡서원 앞의 길가 전공비 곁에 ‘이순신 백의종군로비’를 옮겨 세우게 했다.
그리고 전 산청 교육장이었던 이천규씨도 남명 사상 선양에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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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 행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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