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학과 덕천서원 수호하는데 정성 다한 상산 인물

산청시대 2023-03-01 (수) 02:14 1년전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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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고택
그 당시 강우 지역의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남명집>과 <학기류편>이 정인홍 손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고쳐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 산천재 등에서 모여 교정하여 중간하려고 했다. 단계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대저 <학기> 상하권에는, 실마리를 구하여 힘을 쓰는 것과 자기가 처신하고 남을 다스리는 일과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성현聖賢을 보는 일 등의 대략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 실린 조목은 모두 1.090조이고, 실린 도圖는 모두 24개인데, 이는 모두 남명선생께서 일생토록 도道의 본체를 꿰뚫어 보시고서 일자일구一字一句를 결정하여 지당함을 구한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중간에 여러분들이 망령되이 깎고 고치고자 하니, 마음속으로 매우 싫습니다.-중략- 만약 사사로운 견해로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빼고 더하고 하여 망령되이 그림을 빼내어 버리고 자구를 고친다면 제가 눈을 부릅뜨고 용기를 내어 그 일을 분변하여 배척할 것입니다. -중략- 하물며 3백 년을 내려온 대현大賢의 문집은 여러 선배들의 충분한 교정을 거쳐 아주 상세하게 간행되어 있는데, 이제 조무래기 후배들 가운데 누가 감히 교정의 일에 손을 대며, 누가 감히 교정하자고 입을 벌리겠습니까?’ (상게서, <단계집> 답산천재회중  재인용)

그때 후산, 면우 등이 모두 <남명집> 및 <학기류편> 교정에 참여하였는데, 단계는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복암 등 후손들이 내암과 노장의 흔적을 씻어내려는 계획으로 원근의 명망 높은 학자들과 의논하여 선생의 유집을 변개하려고 했으나 단계는 이를 반대했다.
나는 법물의 상산김씨 가문의 남명학과 덕천서원을 수호하는데 정성을 다한 업적을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지만 단계와 물천의 충심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오이환 교수의 노력으로 상산김씨 가문의 서고에서 <학기류편> 원본을 내암의 이름자가 먹칠된 원본이 보존된 것을 발견한 일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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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곡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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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천서당
오이환 교수의 글을 보자.
‘1988년 정월에 필자는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에 있는 김진호(金鎭祜, 1845~1908)의 종택에서 3권 2책으로 된 <학기류편> 초간본의 완질을 발견하였다. 권두에는 만력45년(1617 광해군 9년) 8월의 내암 서문이 있고, 말미에는 ‘만력 정사(동년)추, 덕천서원 간’이라는 전자로 된 간기가 보인다. 김물천의 스승인 박만성(박치복朴致馥, 1824~1894)은 만년 상당한 기간을 이 마을에 있는 이택당麗澤堂에서 지냈으므로, 그가 말하는 ‘구서’舊序란 바로 이 책에서 본 것임이 거의 확실하며, 그가 ‘어떤 사람’이라 한 것도, 이 서문의 원본에서 먹으로 도말된 부분들이 ‘인홍’ 및 ‘서산정인홍근서’瑞山鄭仁弘謹敍임이 육안으로도 어렴풋이 판독됨으로 내암임이 확인된다.’ (오이환 <남명학파의 연구> 2000 남명학연구원, p149)

법물의 상산김씨의 인물이 융성하여 모두 소개할 수는 없다. 몇 분만 간략히 소개한다.
○급고재汲古齋 김담(金湛 1500~1566)은 상산김씨 8군자 중의 한 분이다. 갈천 임훈, 첨모당 임운, 역양 정유명, 개암 강익 등 남명의 종유인들과 종유했다. 도구 이제신과도 학문을 토론했다. 영상 노수신이 천거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침잠하였다. 목계서원牧溪書院에 동곡 이조(1530~1580)와 같이 향사한다.

○묵재默齋 김돈(金墩 1702~1779)은 단구재 김후의 11세손이다. 김석金碩은 남명 종향 상소문에 서명한 김응두의 이들이고 그의 종조부 김경근의 문인이다. 김돈은 김석의 손자이다. 김돈은 1753년 5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764년에는 덕천서원에서 어은 박정신과 겸재 하홍도의 증손인 괴와愧窩 하대관(河大觀 1698~1776)과 함께 <남명문집별집>을 교정했다. 첫 번째 <산해사우연원록>은 무민당 박인이 1636년에 편찬한 것으로 9권 4책의 필사본이다. 하홍도와 조임도가 1640년에 발문을 지었다. 두 번째 <남명선생별집>의 사우록이 이것이다.
 
○단계端磎 김인섭(金麟燮, 1827~1903)은 김경인의 8세손이다. 정재 유치명 문인. 그의 아들 김수로의 단계집 발문을 보자.
‘18세에 ‘천군天君과의 맹서盟誓’를 지으시고는 뜻을 돈독하게 가지고 힘써 행하셨다. … 일찍이 ‘선비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데에는 두 가지 도 즉, 출出·처處 뿐이다. 출사出仕하면 무언가 해냄이 있어야 하고, 은처隱處하면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하나니, … 성품이 저술著述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부득이 남의 집 글을 써 주어야 할 적에는 반드시 사실에 입각해서 쓰고, 잘 보이려고 하지 않으셨다. … ’ 성性과 천도天道는 공자께서도 드물게 말씀하신 것인데, 오늘날은 입만 열면 ‘리理’니 ‘기氣’니, ‘주리지학主理之學’이니 한다. 그러나 그 실제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잡는 것과 같아 잡아낼 수가 없음은 물론, 처음 글 읽는 이로하여금 지향할 곳을 미혹케 하니 매우 두려워해야 할 만하다’ 하셨다.’ (이상필, <남명학파의 형성과 전개> p212. <단계집>, 단계의 아들 김수로의 발문, 재인용.)

남명선생의 말과 똑같지 않은가? 
<남명선생문집발>에서 단계는 다음과 같이 썼다.
‘출처의 엄정함과 선견지명은 당연히 우리 동방에서 첫째라 하겠다. 흉금胸襟이 쇄락灑落함은 가을 달이 하늘을 지남에 먼지 하나 일지 않는 것과 같으며, 기상氣象이 존엄尊儼함은 태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봄에 만물이 모두 나지막하게 있는 것과 같아서, 위로는 군부君父와 공경公卿, 진신縉紳,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여항閭巷의 필부匹夫와 우부우부愚夫愚婦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 망녕되이 찬을 지어 보았다.’ (상게서 p213. 단계의 <남명선생문집발>)
단계는 남명의 벽립만인壁立萬?의 기상과 출처의 엄정함을 발문에 드러내었다.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1845~1908)는 김경눌의 10세손이다. 교은郊隱 김성일金聲佾의 아들, 자는 치수致受, 호는 간헌艮軒, 약천約泉 또는 물천勿川이다. 성재 허전, 만성 박치복, 한주 이진상의 문인이다.
성재가 서거하자 그 문집을 간행했다. 1889년 판각소板刻所를 법물의 은락재隱樂齋에 설치하고 3년간의 간역刊役 끝에 1891년에 마쳤다. 그 판본을 보관할 장판각藏板閣을 지어 수장하고 진영을 보관할 ‘물산영당’勿山影堂을 마을 뒤편 소당동小塘洞에 조성했다. 따로 이택당麗澤堂을 만성 박치복이 주관하여 건립했는데 물천이 이를 도왔다. 이택당을 건립한 후, 만성이 기거하면서 강학했으나 1894년 병으로 귀가하여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물천이 이택당에 기거하면서 경영했다. 매양 3·9월 강회일에는 허유, 이종기(1837~1902, 호 만구晩求, 정재 성재 문인), 곽종석 같은 장덕長德들을 초청하여 강론했다.
물천은 백운동에 남명선생을 기념할 정자를 세우려다 이루지 못하고 ‘백운동계’를 만들어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之所 8글자를 용문폭포 근처에 새겼다.
남명집, 학기, 연보와 신명사도를 개산改刪하려는 의론이 있자 ‘이것은 선생 심학心學의 큰 관건關鍵이고 후학들이 입덕入德하는 바른길이므로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뒤에도, 덕천서원 훼철 후 중건 때 ‘경의당중건기문’을 지은 홍암弘庵 김진문(金鎭文 1881~1957)이 있고, <덕천사우연원록> 편간시에 같이 일한 여러분이 있다. 
상산김씨 장보들이 덕천서원의 운영이나 남명선생 사업에 동조한 많은 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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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를 채례하는 이택당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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