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가 온 나라로 퍼지고 있는 남명매

산청시대 2023-04-15 (토) 18:29 11개월전 643  
매화는 늙어야 값이 있다 ‘대구수목원’의 매화가 언제 고물이 될 것인가? 2001~2010년 사이에 접목한 것이고, 상당한 세월을 잘 관리해야 명품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산청군에서 기르고 있는 3매도 각각 제 위치에다 옮겨 심어서 군락으로 10주 이상 심고, 그 근처의 인접 진입로 등에 심어 매년 이른 봄이면 그윽한 암향暗香(은은한 향기)이 풍기게 하면 장래를 대비하는 방법도 되고, 고매古梅의 아름다운 모습을 돋보이게 하는 관광자원으로서의 풍치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e7c211d9c52d9f93fb0977a6cbdae5e1_1681550원정매
산청에는 3매가 있다. 
원정매元正梅를 심은 하즙河楫(1303~1380)은 진양하씨 파시조派始祖 하진河珍의 8세손이다.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벼슬을 그만둔 후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원정元正이다. 아들 하윤원河允源(1322~1376)은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고, 증손자 하연河演(1376~1453)은 세종조에 영의정을 지냈다. 하즙의 장녀는 진양 강씨 은열공파 12세손 강수명姜壽明에게 출가했다. 강수명의 후손이 남명의 제자 동곡 이조(1530~1580)와 혼인했다. 차녀는 진양 강씨 강시姜蓍(1339~1400)와 혼인하여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둘째 아들이 강회백姜淮伯(1357~1402)이다. 정당문학政堂文學, 대사헌大司憲,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를 지냈고 시호가 통정공通亭公인데 이분이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심은 매화가 ‘정당매’이고, 통정공의 외조부 하즙이 심은 매화가 원정매이다.
남사 마을의 원정매가 있는 하씨 고택에는 증손자인 하연(1376~1453) 정승이 심었다는 감나무가 있다. 
‘강회백이 심었던 매화 한 그루도 그가 죽은 지 80여 년이 지난 1480년대 초에 말라 죽었다. 김일손보다 2년 앞에 단속사에 들렀던 남효온(1454~1492)은 ‘강회백이 심은 매화는 4, 5년 전에 말라 죽고, 그의 증손인 강구손姜龜孫(자字 용휴用休 1450~1505)이 매화를 다시 심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김일손(1464~1498)은 <두류기행록>에서 ‘강회백의 자손들이 정당매를 대대로 봉식封殖한다’라고 한다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지리산 단속사 그 끊지 못한 천년의 이야기> 박용국, 2010. 원정매, 정당매 이야기는 이 책을 참고해서 썼다.

강회백의 손자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5대손 강항姜沆(1567~1618)은 남원에서 군량미 조달 등 의병 활동을 하다가 남원이 함락하자 다시 고향 영광에서 수백명의 의병을 모아 싸우다 포로로 잡혀 왜국으로 갔다가 2년 반 만에 귀국, <간양록>看羊錄을 썼다. 그 책에 여러 편의 시가 있는데, 진주에서 잡혀 온 사람을 만나 쓴 시에 ‘단속한매화자발斷俗寒梅花自發-단속사의 한매는 꽃이 절로 피었겠지.’라는 구절이 있어 정당매를 엄혹한 포로 생활 속에서도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타난다.

수우당 최영경은 문집이 없고 <수우당실기>守愚堂實記에 유작 약간과 묘도문자墓道文字(묘비문, 제문, 만서 등), 행장 등이 기록되어 있다. 행장과 묘갈명은 원래 내암 정인홍(1535~1623)이 지었으나 계해정변癸亥政變 이후 내암이 처형되자, 갈암 이현일(1627~1704)에게 다시 행장行狀을 받았다. 행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2월에 회연서당檜淵書堂으로 한강 정구(1543~1620)을 찾아간 수우당 최영경(1529~1590)은 백매원百梅園을 바라보았다. 매화가 만발해 있었다. 수우당이 갑자기 하인을 불러 ‘도끼를 가져와 저 매화를 찍어라’하고 호통을 쳤다. 깜짝 놀란 좌우의 사람들이 말리자, 수우당은 ‘매화를 귀히 여기는 것은 눈 내린 골짜기의 추위 속에서 온갖 꽃들에 앞서 피기 때문이다. 지금 복숭아 자두와 봄을 다투고 있으니 어찌 귀한 것이겠느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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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매

산천재 앞에 남명매가 있다. 그 앞에 조그만 돌비에 남명선생의 우음偶吟(우연히 읊다)이라는 오언절구가 적혀 있다.
주점소매하朱點小梅下 작은 매화나무 아래 붉은 점을 찍으며,
고성독제요高聲讀帝堯 크게 소리 내어 요전을 읽는다.
창명성두근窓明星斗近 창이 밝고 북두성이 가까워 오니,
강활수운요江闊水雲遙 강이 훤하고 물안개가 아득하구나.

이 매화나무를 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선생이 산천재를 짓고 그 앞에 매화나무를 심었다면 ‘작은 매화나무’일 것이다. 방에 앉아 <서경>書經의 요전堯典을 읽는다. 중요 대목에 붉은 점을 찍으며 밤새도록 읽었다. 날이 새는지 차차 창이 밝아진다. 창문을 열어보니 북두칠성은 서쪽 하늘로 기울었고,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축으로 하늘을 빙 돈다) 산천재 앞의 덕천강이 훤한데 아득히 물안개가 일고 있다. 덕천강은 하천을 매립하기 전에는 산천재 바로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주 서경적이면서도 선비의 유유자적하는 모습이다. 선생의 애제자 수우당이 미물인 매화가 실절失節한 것을 꾸짓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서할 수 없는 지기추상持己秋霜의 모습이 떠오른다.

여러 해 전에 전 경남문협 회장, 시조 시인 김복근 선생이 남명매 종자를 구할 수 없느냐기에 산천재에 가서 매화나무 밑을 돌아 한 알을 주어서 택배로 보내드렸지만 발아에 성공했는지 모르겠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매화나무의 수명이 실생 목은 천년을 가고 접목 목은 오백 년 정도 밖에 못 산다고 한다. 금년에 다시 전화가 왔다. 남명매 후계목을 구할 수 있느냐길래 강호철 교수를 소개해 드렸다. 통도사 방장 성파性坡(1939~) 스님께 드려서 암자 앞에 심겠다 한다.
이제 남명매는 강우江右의 산천재에만 있지 않고 남명학이, 선생의 유향이, 매화 향기가 사방으로 번져나가듯 온 나라로 퍼지고 있는 것인가? 매화는 하나의 꽃에 불과 하지만 우리의 선비들이 얼마나 사랑했고, 많은 교훈을 받으며 살아왔는지를 가슴속에 새기면서 매화를 탐방하고 그 은은한 향기를 음미해야 할 것이다.

2000년대 초, 매화 탐방객들과 단속사 정당매를 찾았더니 노인 몇 분이 매화우가 날리는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들고 계셨다. 그중의 한 분이 김태순金泰淳(1926-2008)씨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나는 매년 매화꽃이 필 때마다 산청 삼매를 찾아 오느만…”하셨다. 그분은 ‘덕천서원’ 헌관으로도 모신 적이 있는 거창의 명사다. 의사요 문화원장을 지낸 향토 사학자이기도 하다. <거창군사> 등 여러 권의 책을 썼고,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 400여 점을 거창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런 선비가 왜 꽃필 때면 명매를 찾아 올까?
언젠가는 정옥임씨를 꼭 찾아 만나 그분들이 고매를 찾아 후계목을 양성해 지키는 정성을 기념 상찬하고 싶다. 지금 온 나라 곳곳에 미세먼지도 날고 있지만, 매화꽃 향기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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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 남명매앞에서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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