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고장 산청, 학문과 실천 교육 산실 탄생

산청시대 2023-09-13 (수) 13:03 2개월전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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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학관 전경                                                          몽학관기문

단성 유림회관 몽학관 개관

선비의 고장 산청군 단성면에 선현들의 삶과 지혜를 계승하는 몽학관(夢鶴館)이 개관됐다. 
산청군은 지난달 31일 단성면에서 단성유림회관 몽학관 개관식을 개최했다. 
개관식에는 권재호 성균관 부관장을 비롯한 경남도내 각 향교 전교와 유림, 산청군 관계자 등 170여명이 참석했다.
지난 2021년 12월에 착공한 몽학관은 2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지난해 11월 준공했다. 
몽학관은 옛 단성현 객사로 사용했던 몽학관을 본떠 한옥으로 건립했다. 단성현 객사는 지금의 단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건물로 옛 몽학관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있다. 
몽학관은 전교실과 교육장이 있으며 예절교육, 서예, 한문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몽학관이 완공됨으로서 그동안 지역 내 향교를 중심으로 이뤄져 오던 청소년, 군민 대상 인성·예절교육과 유교 경전 교육 등을 한 자리에서 효율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또 남부권역 유림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교류 장소로 활용하고, 청소년 대상 인성교육 충효 교실 등 유교문화 교육의 장으로 운영할 방침이다.
특히 조선시대 실천 유학의 대가 남명 조식 선생의 선비정신을 잇는 역사 문화 교육시설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통해 지역민에게 전통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청소년에게는 선현의 삶과 지혜를 통해 올바른 가치관과 인성을 함양하고 재정립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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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복 전교
단성현 객사 활용한 몽학관 본떠 한옥 건립

준공식에서 권영복 단성향교 전교는 몽학관 건립추진에 어려웠던 경과를 설명하며 “우리 단성고을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며 특히 삼우당 문익점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 면우 곽종석 선생은 우리 민족의 대 스승인데 모두 우리 단성고을 출신이다”라고 인사했다. 
서정현 유도회장은 “선비가 학문을 익히는 것은 기본이지만, 아는 것도 중요하고, 더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며 몽학관이 학문과 실천 교육의 산실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준공에 즈음하여 직전 전교를 지낸 성균관 권재호 부관장은 몽학관 기념식수로 주목 4그루를 헌정했다.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고 하며 몽학관의 무궁한 보존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몽학관의 정원에는 여성유도회원들이 검은 치마 흰 저고리를 입고 베틀을 차려놓고 목화에서 무명베가 될 때까지의 과정을 재현하여 단성이 목화시배지요 의류 혁명의 산실임을 증명했다.

몽학관 유래, 적벽 얽힌 소동파 명작 <적벽부>

객관의 편액을 몽학관(夢鶴館)이라 한 것은 그 유래를 적벽에 얽힌 소동파의 명작 <적벽부>에서 찾을 수 있다. 
<적벽부>에 이르기를, 
‘가을밤 적벽강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때는 야반이요, 사방을 둘러보니 고요하기만 한데, 마침 외로운 학(鶴) 한 마리가 검은 치마 흰 저고리의 모습으로, 나래는 수레바퀴와 같은데 알연히 울면서 배를 스쳐 서쪽으로 날아갔다.
뱃놀이는 절정을 이루고 이윽고 모두가 술이 취해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도사가 우의(羽衣)로 날아와서 묻기를 “적벽 놀이가 즐거운가?” 하므로 그 성명을 물으니 몸을 굽히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아 내 그대를 알겠구나. 어젯밤에 울면서 뱃전을 스쳐 간 학(鶴)이 그대가 아니더냐” 하니 도사(道士)가 웃고, 나도 놀라 깨어보니 간 곳이 없더라.’라고 하여 신선의 경지를 이야기 한데서 몽학(夢鶴)이란 명칭이 나온 것이라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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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한 유림                                                                    무명 베짜기 시연

“도의 선양·향풍 진작에 획기적 계기 될 것”

아래는 덕암 손성모 선생이 지은 ‘몽학관 중건기’다.
‘고을의 관아에 객사를 두게 된 것이 고려 초의 일이니, 우리 강성군(江城郡) 시대로 위치는 강루리였다. 당시에 적벽강이 근접하고 있어 명칭을 소동파의 적벽부에 연유하여 몽학관이라 하였다. 조선 세종 연간에 단계현을 병합하여 단성이 되고 관청을 래산하(來山下)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건물이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서 광복 후에까지 남아있었다. 그 위치는 현 단성초등학교 경내였는데 주련 화각이 지금도 눈에 선연하다. 
조선 인조 시에 경상도 관찰사 오숙이 지은 시구 중 ‘성곽연하경 경상팔구가’(城郭煙霞境 耕桑八九家)에서 당시 정경을 현재도 떠 올려볼 수 있다. 고종시(高宗時)에 몽학관을 중수한 기록은 현감의 중수기문을 성주 이도문 공이 대찬한 문헌이 소연하다. 전패를 안치하고 빈객을 접대하며 연회 등 중요 회합 장소로 쓰던 객사는 단성민란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였는데 왜정 시 현청을 행정관서로 쓰면서 몽학관은 학교의 교무실로 하다가 불의의 훼철을 당하게 되었다.
산천지승과 인물지성이 국내 저향으로 이름났던 고을의 상징물을 잃고 그리는 마음은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날로 더해가면서 여러 차례 복원을 당국에 건의하던 차에 이재근 산청군수와 심재화 의장의 성력으로 도군비 20억원을 들여 거창한 사업을 이루게 되었다. 시대의 추이에 따라 향교의 유림회관을 병용하기 위하여 권영복 전교의 적극적 추진이 주효하였다. 새 건물의 굉려한 위용은 옛 고을의 영화를 되새기고 쇠퇴한 도의 선양과 향풍 진작에 획기적 계기가 될 것이다.
동으로 신안강이 감돌아 염락지원을 이루고 서(西)로 니구산이 흘입하여 추로지향(鄒魯之鄕)을 발현하였으며 북으로 백마 적벽산이 굳건히 옹위하는 가운데 남으로 천리안대가 열려 남해 훈풍이 불어오는 천혜의 길지에 웅장 화려하게 나래를 펼친 이 루관이 관수 영원하고 번화무궁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사실기를 불영에게 청함에 대망의 쾌사가 이루어짐에 가슴 벅차 문득 졸렬함을 잊고 우와 같이 전후사를 약기 한다.’

심동섭 편집위원 / 진주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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