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동민의 가야문화 유적 탐방기(1) ‘돌 속에 묻혀서라도 백성을 지키겠다’

산청시대 2018-01-11 (목) 12:46 6년전 2057  

금관가야 마지막 왕 쉼자리 ‘구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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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면 왕산 자락 대형 돌무덤 조성
나라 잃은 왕의 아픔 묻어나는 유적
시조 김수로 왕 머문 왕산서 영면해

일국의 왕이었지만 적국 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식솔들과 함께 산 속 깊숙이 도망치듯 떠나와야 했던 비운의 왕.
죽어서도 편히 영면하지 못하고 나라 잃은 자신의 죄를 탓하며 돌로 무덤을 만들어 달라 했던 왕. 
가락국(김해 금관가야) 마지막 왕(제10대) 구형왕의 이야기다.

금관가야는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경북 고령의 대가야, 상주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까지 6개 가야왕국 중 김수로왕에 의해 첫 번째로 건국됐으며, 지금의 경남북 지역에 걸쳐 50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다.
가락국 마지막 왕은 지리적으로 국경이나 다름없었을 산청의 왕산 아래 작은 계곡으로 들어와 여생을 마쳤다.
안타깝게도 이 같은 이야기는 대부분 예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로 미뤄 짐작할 뿐 당시 구형왕과 가락국, 가야왕국의 역사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아쉽기 그지없다.
최근 고대 왕국 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김해를 비롯해 많은 자치단체에서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산청군은 현재 지역 가야 시대 유적인 생초고분군과 어외산성, 중촌리고분과 백마산성, 구형왕릉에 대한 학술용역을 실시하고 있다. 현황조사와 함께 주변 관광자원과의 연계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다.

경사면 따라 피라미드 모양의 돌무덤

그 중에서도 사적 제214호로 지정된 구형왕릉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의 마지막 쉼자리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모신 덕양전에서 건물 왼편 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오면 왕릉의 입구인 홍살문이 보인다.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한겨울의 구형왕릉은 왠지 더욱 쓸쓸한 느낌이다.
홍살문 앞에는 구형왕릉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현황 등에 대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구형왕릉은 경사면을 따라 피라미드 모양으로 만든 독특한 형태의 돌무덤이다.
나라를 잃은 왕이 자신을 자책하며 ‘돌 속에 묻혀서라도 가야 백성을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긴 탓에 이같이 특이한 석조물이 생겼다니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 구형왕의 아픔과 절절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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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왕릉 비석


마지막 순간까지 백성의 안위를 걱정

‘구형왕’은 ‘양왕’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이름에는 나라 잃은 왕의 아픔이 담겨 있다. 바로 왕위를 넘긴 왕이라는 의미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구형왕이 ‘나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기지 못할 전쟁에서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도 국왕의 도리’라 생각해 가야의 백성을 노예로 삼지 않고, 양민으로서 신라백성으로 받아줄 것은 합의한 후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명예보다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던 그의 마음이 후대에 전해졌기 때문일까.

양왕 손자 김유신, 신라 화랑으로 공신

구형왕의 자식들은 신라에서 귀족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후에 그의 손자인 김유신은 신라의 화랑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이 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구형왕릉에서 내려오는 계곡길 어귀에서 김유신 장군이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사대비를 볼 수 있었다.
구형왕의 손자인 김유신이 젊은 시설 할아버지의 무덤인 구형왕릉을 찾아 왕릉을 돌보며 무예를 갈고 닦아 삼국통일의 영웅이 되었다고 하니 구형왕의 설움과 한을 손자가 풀어준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복원사업으로 양왕의 새 생명 얻기를

양왕의 아픔이 조금은 가셨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은 또 있다. 구형왕릉을 품고 있는 왕산이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이 말년을 보낸 별궁인 태왕궁이 있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구형왕은 김수로왕 별궁이 있던 태왕궁지에 수정궁을 짓고 여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구형왕은 시조 할아버지가 계셨던 왕산으로 들어와 나라를 잃은 죄를 용서받고 아픔을 위로받기를 원한 게 아니었을까.
다만 현재 수정궁터로 알려진 곳은 수풀이 무성해 표지판이 없다면 알아차리기 힘들고 역사적 검증이 미흡해 조사나 발굴, 보존이 이뤄지지 않은 점은 자못 아쉽다.
김해 금관가야가 고대왕국 가야문화의 시작이라면 산청의 구형왕릉은 그 마지막 역사를 품고 있다. 아직은 많지 않은 몇 가지 기록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존하고 있지만 앞으로 추진되는 가야 역사문화 복원사업을 통해 가락국 마지막 왕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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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구형왕릉                                         덕양전 전경

 

 

글·사진/ 곽동민 산청군청 공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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